실제로 일어난 도시 전설 속 진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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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여대생 살인사건, 마지막 통화 뒤의 수사 공백 목포 여대생 살인사건은 2010년 간호학과 4학년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의 몸에서 남성 DNA가 검출됐고 현장 부근 차량에 관한 목격 진술도 확보됐지만, 제공된 보도에 담긴 수사 결과에서는 범인이 특정되지 않았다. 수사의 핵심은 마지막 연락 이후의 이동 경로와 차량 목격담을 물증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에 있었다. 마지막 통화 이후 귀가 동선이 끊겼다 당시 사건 경과를 다룬 보도에 따르면 22세였던 피해자는 간호학과 졸업과 국가고시를 앞두고 있었다. 서울의 대형병원 취업이 확정된 상태였으며, 시험 준비를 위해 정기적으로 하던 아르바이트를 중단했다. 사건 당일에는 대체 근무 요청을 받고 목포시 상동의 한 극장 안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다. 2010년 10월 15일 오후 11시 11분, 피해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출발했다. 용해동 집까지는 약 1.5㎞였다. 오후 11시 14분부터 11시 21분까지 언니와 주고받은 문자에는 걸어서 귀가 중이며 공원길을 이용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오후 11시 26분에는 지인에게 전화했다. 이어 다른 친구와 통화했고, 해당 보도는 오후 11시 41분의 통화를 마지막 전화 연락으로 기록했다. 귀가 중 울고 있던 여성을 산책하던 부부가 목격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다만 보도에는 이 목격 지점과 통화 당시 위치를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기록이 없었다. 일부 후속 보도는 사건 날짜를 10월 5일로 적고 오후 11시 41분의 마지막 연락을 언니에게 보낸 문자로 설명했다. 이는 상세한 통신 경과를 제시한 보도와 어긋났다. 이 차이를 피해자의 추가 행적이나 목격자의 진술 번복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었다. 마지막 연락 시각이 곧 범행 시각은 아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자정 무렵 귀가한 언니는 동생이 돌아오지 않자 파출소에 신고했다. 피해자는 다음 날인 16일 오전 4시 30분쯤, 집에서 약 630m 떨어진 산책로 아래 배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보도된 내용만으로는 마지막 통화부터 발견까지의 어느 시점에 공격이 시작됐는지 확정할 수 없었다. 시신 발견 장소와 범행 장소는 구분해야 했다 당시 보도는 피해자에게 얼굴과 턱 등 여러 부위의 폭행 흔적과 목을 조른 흔적이 있었다고 전했다. 경찰은 폭행 후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사건으로 판단했다. 사건 발생 사흘 뒤에는 시신 발견 지점에서 약 2.1㎞ 떨어진 바닷가에서 피해자의 소지품이 발견됐다. 가방 안에는 청바지와 신발, 신분증이 든 지갑이 있었다고 보도됐다. 이는 피해자와 소지품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누가 어떤 경로로 소지품을 옮겼는지, 당시 지갑에 현금이 남아 있었는지는 보도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초기에는 성폭행을 시도하다 피해자가 반항하자 살해했을 가능성을 검토했다. 다른 사건 설명에는 성범죄나 금품 목적 범죄가 아니었다는 서술도 있었지만, 이를 확정한 감정 결과나 수사 발표는 제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가설이 최종적으로 배제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피해자의 몸에 쓸린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차량 내부 범행을 추정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흔적의 부재만으로 범행 장소가 차량 안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배수로가 최초 공격 장소였는지, 다른 곳에서 범행한 뒤 피해자를 옮긴 장소였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할 문제였다. DNA는 확보됐지만 대조에서 일치자가 나오지 않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의 손톱 밑에서 남성 DNA가 검출됐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관련 보도는 손톱 밑을 포함한 여러 신체 부위에서 동일한 남성 DNA가 검출됐다고 전했다. 다만 감정서 원문이나 검출량, 접촉 시점을 판단할 정보는 제시되지 않았다. 경찰은 지인과 동종 전과자, 인근 주민 등으로 조사 범위를 넓혔다. 사건 후 5년간의 수사를 다룬 보도는 조사한 사람이 6000여 명,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한 사람이 2015명이었다고 기록했다. 방송 관련 보도에는 DNA 대조 대상이 3000여 명으로 제시됐다. 두 수치는 보도 시점과 집계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합산하거나 같은 시점의 수치로 비교할 수 없었다. 두 보도가 공통으로 전한 결과는 대조에서 일치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보도에는 DNA 분석으로 특정 성씨에 수사 범위를 좁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분석 방법과 정확도는 제시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DNA 제공자의 성씨가 확정됐다고 서술할 수는 없었다. 수사 규모와 신원 확인은 별개였다. 많은 사람을 조사했다는 사실만으로 확보된 DNA의 제공자가 실제 대조 대상에 포함됐다고 볼 수는 없었다. 나비 스티커는 차량을 찾는 단서였지만 범행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현장 인근 주민은 자정 가까운 시각에 비명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산책로를 달리던 다른 목격자는 비명에 아래쪽을 봤을 때 배수로 옆에 짙게 선팅한 검은 차량이 있었으며, 뒷문이 닫히는 순간 여성의 다리 한쪽을 봤다고 말했다. 택시기사는 현장 부근 차량의 트렁크에 나비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차량은 초기 보도에는 검은색으로, 후속 보도에는 광택 없는 짙은 회색의 튜닝된 중형 승용차로 묘사됐다. 이 차이가 조명이나 관찰 조건 때문인지, 서로 다른 차량에 관한 진술인지는 보도만으로 판별할 수 없었다. SBS 방송 관련 보도는 한 자동차 동호회의 전남 지역 회원들이 나비 모양 스티커를 사용했고 사건 당일 목포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전했다. 해당 방송의 정확한 방영일은 제공된 내용에 명시되지 않았다. 같은 보도에서 동호회 측은 검사받은 회원 가운데 DNA 일치자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일부 회원은 경찰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사받은 회원에게서 일치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결과와 전체 회원의 대조가 완료됐다는 판단은 구분해야 했다. 동시에 모임 날짜나 스티커 사용 사실만으로 동호회 또는 특정 회원을 범행과 연결할 근거도 없었다. 보도에는 해당 차량에서 피해자의 흔적이 검출됐거나 차량 소유자의 DNA가 일치했다는 결과가 제시되지 않았다. 몽타주와 현장 DNA를 연결할 근거가 남아 있었다 당시 보도에는 사건 전 현장과 체육공원 사이를 오가던 남성을 봤다는 진술이 있었다. 목격자는 그를 키 약 170㎝의 호리호리한 20대 중후반 남성으로 묘사했다. 모자를 깊이 써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 남성이 차량에 탑승했거나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장면을 봤다는 내용은 없었다. SBS 방송 관련 보도는 2010년 전후 현장 인근에서 차량 납치나 성폭행 시도를 당했다는 제보와 이를 바탕으로 한 몽타주를 소개했다. 한 제보자는 몽타주가 자신을 공격한 남성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사 사건의 가해자와 목포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이 동일인이라는 감정 결과는 제시되지 않았다. 일부 사건 설명은 목격 진술이 흔들렸다고 평가했지만, 누가 어떤 진술을 언제 바꿨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초동수사에 대한 평가 역시 서로 달랐다. 이러한 요약만으로 특정 진술을 허위로 보거나 수사 실패의 원인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나비 스티커 차량의 탑승자와 피해자의 몸에 DNA를 남긴 남성이 같은 사람인지는 보도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차량 목격담이 범행의 증거로 이어지려면 먼저 이 연결이 입증돼야 했다.

댜틀로프 고개 사건, 1959년 수사와 2020년 결론 1959년 1월 말, 이고리 댜틀로프가 이끄는 등산대가 소련 북부 우랄산맥으로 들어갔다. 1959년 형사사건 기록에는 최종적으로 9명이 산악지역에서 사망한 사건으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적혀 있다. 일행 가운데 유리 유딘은 건강 문제로 중도 이탈했고 사망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행은 경험이 없는 초보자들이 아니었다. 2021년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발표된 연구는 이들을 경험이 있는 러시아 등산가 집단으로 설명한다. 연구진은 이들이 1959년 2월 초 홀라트샤흘 산의 경사면에 텐트를 설치한 뒤 모두 사망했다고 당시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다. 정확히 어떤 순간에 문제가 시작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초 일행은 예정된 시기까지 귀환하지 않았다. 이후 수색이 시작됐고, 1959년 2월 26일 수색대가 홀라트샤흘 북동쪽 경사면에서 텐트를 발견했다. 당시 현장조사 기록에는 텐트 아래에 스키가 깔려 있었고 배낭, 신발, 의류, 식량, 취사도구와 개인 소지품 상당수가 내부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됐다. 텐트의 상태는 수사의 핵심이 됐다. 1959년 4월 실시된 법과학 감정에서 텐트에는 길이 약 32cm, 89cm, 42cm의 절단 흔적 세 곳이 확인됐다. 감정인 겐리에타 추르키나는 현미경으로 천의 손상 방향을 조사한 뒤 세 절단부가 모두 텐트 안쪽에서 날붙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추정이 아니라 당시 형사사건에 편철된 감정 결과다. 수색대는 텐트에서 숲 방향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흔적도 확인했다. 당시 수색 기록에는 일부가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판단되는 발자국이 있었다고 남아 있다. 텐트 안에는 신발과 방한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 왜 영하의 산악지대에서 숙련된 등산대가 신발과 상당수 장비를 두고 텐트를 빠져나왔는지가 사건의 첫 번째 공백이었다. 첫 시신들은 텐트 아래쪽 숲에서 발견됐다. 이후 수색 범위가 확대되면서 추가 시신들이 발견됐고, 마지막 네 명은 눈이 녹기 시작한 뒤 계곡 지형에서 발견됐다. 1959년 수사자료에는 시신 발견 위치와 부검 결과가 각각 기록돼 있다. 사인은 모두 동일하지 않았다. 2020년 러시아 검찰 재조사 결과를 보도한 타스 통신에 따르면 검찰은 졸로타료프, 두비니나, 티보 브리뇰을 제외한 사망자들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저체온증으로 판단했다. 나머지 세 사람에게서는 중대한 외상이 확인됐으며 검찰은 그 손상이 눈사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압박성 손상과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1959년 부검기록에는 류드밀라 두비니나의 흉곽 손상과 니콜라이 티보 브리뇰의 두개골 손상 등이 기록돼 있다. 당시 수사자료에는 세묜 졸로타료프에 대한 별도의 부검 기록도 남아 있다. 두비니나에게서 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여러 추측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제시된 자료만으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혀를 제거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오랜 기간 계곡의 물과 눈에 노출됐다는 점을 포함해 사후 변화 가능성이 제기돼 왔지만, 정확한 소실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의복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는 사실도 사건의 군사실험설과 연결됐다. 1959년 사건 자료에는 실제 방사선 검사 문서가 존재한다. 다만 방사선 검출 사실만으로 군사무기가 등산대의 사망 원인이었다고 판단한 공식 수사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수사는 결국 명확한 범죄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이후 UFO, 군사실험, 공격, 특수한 바람 등 여러 가설이 제시됐지만, 2021년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 논문은 이런 설명들을 과거에 제기된 가설로 분류했다. 해당 논문 자체도 특정 인물이나 군사작전을 범행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사건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반론은 눈사태설이었다. 초기에는 반대 근거가 있었다. 2021년 연구진이 정리한 기존 반론을 보면 텐트 주변에서 뚜렷한 대규모 눈사태 흔적이 보고되지 않았고, 텐트 위쪽 경사도가 일반적인 눈사태 발생 조건보다 낮게 보였으며, 일부 사망자의 흉부와 두개골 손상이 전형적인 눈사태 피해와 다르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렇다면 눈사태가 없었다는 초기 인상과 텐트를 긴급히 탈출한 행동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가. 러시아 검찰은 사건 발생 60년 뒤 다시 현장을 조사했다. 2019년부터 진행된 검찰 조사에서는 자연현상에 초점을 맞춰 여러 가설을 검토했고, 2020년 7월 11일 러시아 검찰 관계자 안드레이 쿠랴코프는 눈사태가 사건의 원인이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일행이 눈사태 때문에 텐트를 떠났고 이후 텐트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범죄 개입 가능성도 배제했다. 2020년 발표에 따르면 조사팀은 주요 가설들을 검토했고 최종적으로 자연현상에 의한 사고라는 판단을 내렸다. 눈사태설은 이후 별도의 물리학 연구에서도 검토됐다. 2021년 요한 가우메와 알렉산더 푸즈린은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눈판 눈사태 모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등산대가 텐트를 설치하기 위해 경사면의 눈을 잘라냈고, 이후 강한 바람이 위쪽에 눈을 지속적으로 쌓이게 했을 경우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제한된 규모의 눈판이 미끄러질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 모델에서는 대규모 눈사태가 아니더라도 텐트 내부 사람들에게 심각한 외상을 줄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눈사태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직접 증거를 새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연구진도 논문에서 눈판 눈사태가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으로 가능한 메커니즘이라고 제시했다. 이후 연구진은 현장 조사를 이어갔다. 2022년 같은 학술지에 실린 후속 보고에서는 댜틀로프 고개 주변에서 실제 눈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며, 텐트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 위쪽 경사가 눈사태 발생에 충분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는 현장 자료가 제시됐다. 1959년 텐트 감정과 2020년 검찰 조사 결과를 함께 놓으면 적어도 한 가지 행동은 설명된다. 일행은 텐트 안에서 천을 잘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1959년 감정 결과가 이를 확인한다. 러시아 검찰은 그 행동의 원인을 눈사태 위험에 대한 긴급 탈출로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밤에 정확히 어느 정도의 눈이 움직였는지, 누가 먼저 위험을 인지했는지, 일행이 텐트로 돌아가려다 어느 순서로 사망했는지는 직접 목격자가 없어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확인 가능한 공식 판단은 2020년 러시아 검찰이 제시한 눈사태와 이후의 저체온 및 외상이다. 2021년과 2022년의 과학 연구는 그 설명이 해당 지형에서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근거를 추가했다. 1959년 2월 그 밤에 일어난 행동을 초 단위로 복원할 자료는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안쪽에서 절단된 텐트, 장비를 남겨둔 탈출,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발견된 9명의 시신, 그리고 수십 년 뒤 눈사태를 원인으로 판단한 재조사 기록이다. 텐트를 떠난 정확한 순간부터 숲 아래에서 각자가 마지막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까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OJ심슨 사건, 형사 무죄와 민사 책임은 왜 갈렸나 1994년 6월 13일 자정이 지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드의 주택 밖에서 니콜 브라운 심슨과 로널드 골드먼의 시신이 발견됐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정리한 사건 기록에 따르면 니콜 브라운 심슨은 35세, 로널드 골드먼은 25세였다. 두 사람은 전날인 6월 12일 흉기에 의해 사망했다.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사람은 니콜의 전남편 오렌설 제임스 심슨, O.J. 심슨이었다. 심슨은 당시 미국에서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AP가 2024년 그의 사망 당시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68년 하이즈먼 트로피를 받았고, 1969년 NFL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지명됐다. NFL에서는 한 시즌 2,000야드 이상을 달린 최초의 선수가 됐다. 선수 생활 이후에는 영화와 방송에도 출연했다. 니콜 브라운과 심슨은 1985년 결혼했고 두 자녀를 두었으며 1992년 이혼했다. AP의 회고 보도는 두 사람의 관계에 가정폭력 문제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후 형사재판에서 검찰도 가정폭력 관련 증언을 사건의 한 축으로 제시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1995년 검찰 측 입증 과정을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검찰은 재판 초반부터 관련 증인들을 불렀다. 사건 발생 닷새 뒤인 1994년 6월 17일 상황은 수사를 전국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당시 사건 일지에 따르면 심슨은 경찰에 예정대로 출석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오랜 친구인 앨 카울링스가 운전하는 흰색 포드 브롱코가 고속도로에서 발견됐고 경찰이 뒤를 따랐다. 저속으로 이어진 추적은 방송을 통해 생중계됐다. 심슨은 추적이 끝난 뒤 체포됐고 두 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심슨은 무죄를 주장했다. 1995년 1월 형사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검찰은 심슨과 범죄현장을 연결하는 물증을 제시했다. 그중 핵심은 혈흔과 DNA였다. 1995년 5월 11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법정 보도에 따르면 Cellmark Diagnostics의 로빈 코튼은 법정에서 피해자들의 시신 근처에서 발견된 혈흔의 DNA 검사 결과가 심슨의 DNA 패턴과 일치한다고 증언했다. 심슨의 자택 침실에서 발견된 양말의 혈흔은 니콜 브라운 심슨의 혈액과 일치한다는 검사 결과도 제시됐다. 장갑도 중요한 증거였다. 검찰은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장갑과 심슨의 자택에서 발견된 장갑을 사건과 연결했다. 1995년 5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보도한 캘리포니아주 법무부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심슨 자택에서 발견된 장갑의 여러 혈흔은 두 피해자의 혈액과 일치했고, 적어도 하나의 혈흔에서는 심슨과 일치하는 결과가 검찰 측 증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 장갑은 검찰에 유리한 증거로만 작용하지 않았다. 1995년 6월 법정에서 심슨이 문제의 가죽장갑을 직접 착용하는 절차가 진행됐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장갑은 심슨의 손에 제대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변호인 존니 코크런은 최종변론에서 장갑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무죄 주장의 핵심 요소로 활용했다. 검찰이 제시한 DNA와 혈흔이 있었는데도 배심원은 왜 합리적 의심을 넘는 유죄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 측은 증거 수집과 보관 절차의 신뢰성을 공격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변호인 측 전문가들은 LAPD의 증거 처리 과정에서 오염 가능성을 제기했고, 일부 증거가 조작됐을 가능성도 주장했다. 형사재판에서 배심원이 어떤 단일 이유 때문에 무죄를 선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배심원 평결은 개별 배심원의 판단 이유를 판결문처럼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에 대한 신뢰 문제도 재판의 중요한 쟁점이 됐다. LAPD 형사 마크 퍼먼을 둘러싼 문제가 대표적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정리한 재판 기록에 따르면 변호인 측은 퍼먼과 관련된 녹음 자료를 제시했고, 퍼먼은 이후 변호인 측 질문에 미국 수정헌법 제5조에 따른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문제는 변호인 측이 경찰 수사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데 사용됐다. 1995년 10월 2일 배심원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평결에 도달했다. 다음 날인 10월 3일 법정에서 무죄 평결이 선고됐다. 심슨은 니콜 브라운 심슨과 로널드 골드먼 살인 혐의에 대해 형사법상 무죄가 됐다. 여기서 O.J. 심슨 사건을 다룰 때 반드시 구분해야 할 문제가 생긴다. 형사재판에서 심슨이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따라서 그가 두 사람을 살해했다고 형사법상 확정된 사실처럼 서술할 수 없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 유족들은 심슨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민사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 재판에서는 DNA 전문가와 경찰 관계자를 포함한 증인들이 출석했고 심슨 자신도 증언했다. 형사재판에서 직접 증언하지 않았던 심슨이 민사재판에서는 배심원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했다. 1997년 2월 4일 민사배심원은 형사재판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당시 두 재판을 비교한 기록에 따르면 민사배심원은 만장일치로 심슨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배심원은 총 3,350만 달러의 배상을 명령했다. AP 역시 심슨 사망 당시 이 민사판결과 3,350만 달러의 배상 명령을 확인해 보도했다. 따라서 같은 사건에 대해 두 개의 법적 결과가 존재한다. 형사재판에서는 무죄였다. 민사재판에서는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인정됐다. 이 차이는 두 재판이 동일한 질문과 동일한 입증 기준으로 진행된 절차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형사재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의 유죄를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입증해야 한다. 민사재판의 책임 판단에는 형사재판보다 낮은 입증 기준이 적용된다. 심슨에 대한 추가 살인 형사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AP의 2024년 보도와 당시 사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생전 두 사람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 발생 약 30년 뒤인 2024년 4월 10일 심슨은 76세로 사망했다. 그의 가족은 다음 날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망 사실을 발표했으며, AP는 심슨이 전립선암을 앓았다고 보도했다. 니콜 브라운 심슨과 로널드 골드먼을 살해한 혐의에 대한 형사재판의 최종 기록은 1995년 10월 3일의 무죄 평결이다. 동시에 1997년 민사배심원은 심슨에게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두 판단은 어느 한쪽을 지워서 설명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사이공 처형」: 사이공 경찰청장이 베트콩 포로를 사살한 순간, 1968년 1968년 2월 1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남베트남 국가경찰 총수였던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은 권총을 들어 베트콩 대원 응우옌반렘(Nguyễn Văn Lém)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격 직후 로안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자들은 우리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습니다. 부처님도 나를 용서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처형 장면은 NBC의 TV 카메라와 AP통신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Eddie Adams)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과 영상은 곧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순식간에 베트남전쟁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 에디 애덤스가 촬영한 사진이 특히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카메라가 포착한 순간이 사실상 죽음과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로안이 방아쇠를 당긴 직후 촬영된 사진에서 렘의 얼굴에는 극심한 고통이 그대로 드러난다.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하는 바로 그 찰나가 사진 한 장에 멈춰 버린 것이다. 애덤스는 훗날 이런 말을 남겼다.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의 말은 자신이 촬영한 이 사진의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수갑이 채워진 포로의 머리에 한 장교가 권총을 겨누고 지근거리에서 사살하는 장면을 담은 이 사진으로 애덤스는 1969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동시에 이 사진은 미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악화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것만큼 당시 상황이 단순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 사진 속에서 총을 맞은 남자는 응우옌반렘이었다. 남베트남 측의 주장에 따르면 렘은 베트콩의 이른바 ‘보복부대’ 또는 암살조를 지휘한 인물이었다. 이 부대는 남베트남 경찰관들을 공격했으며 경찰관을 찾지 못할 경우 그 가족들까지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렘이 체포된 장소 주변에서는 경찰관 가족 최소 7명의 시신이 포함된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는 증언도 있다. 사진기자 애덤스 역시 훗날 남베트남 측의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였다. 다만 애덤스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은 렘이 붙잡히기 전의 사건이 아니라 처형 장면이었다. 체포된 렘은 로안에게 끌려왔다. 로안은 그에게 잠시 질문한 뒤 자신의 .38구경 리볼버를 꺼내 머리에 단 한 발을 발사해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사진만 놓고 보면 한쪽에는 무기를 들고 저항할 수도 없는 포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장군이 있다. 이 때문에 사진은 공개되자마자 전쟁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고, 총을 쏜 응우옌응옥로안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의 잔혹함을 대표하는 인물로 각인됐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한 애덤스 자신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 사진이 로안이라는 한 인간을 규정해 버린 방식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됐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 애덤스는 훗날 자신이 이 사진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로안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 1998년 애덤스는 타임(Time)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심경을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그 사진 속에서 사실상 두 사람이 죽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총탄을 맞은 응우옌반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진으로 인해 평생의 이미지가 결정돼 버린 응우옌응옥로안이었다. 애덤스는 사람들이 사진을 사실이라고 믿지만 사진 역시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조작하지 않은 사진조차 전체 진실이 아닌 ‘절반의 진실’만 보여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에는 그 장면이 찍히기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로안이 무엇을 보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그리고 렘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덤스는 이런 취지의 질문도 던졌다. 그 뜨거운 날, 바로 그 장소에서 자신이 로안 장군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자신의 부하와 동료들이 살해된 상황에서 그 일을 저질렀다고 믿는 적군을 붙잡았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물론 이것이 현장에서 이루어진 즉결처형의 정당성을 자동으로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애덤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사진 한 장만으로 복잡한 전쟁 상황과 한 인간의 모든 행동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에 가까웠다. 그는 이 사진이 로안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로안은 애덤스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당신이 찍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찍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애덤스의 죄책감은 오랫동안 남았다. 1998년 로안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유족에게 꽃을 보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합니다. 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응우옌응옥로안은 어떻게 살았나 ‘사이공 처형’ 사진은 이후 로안의 남은 생애를 따라다녔다. 사진이 촬영되고 몇 달 뒤 로안은 전투 중 기관총 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부상이 심각해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진 속 그의 모습은 잊히지 않았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는 그를 추방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추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로안은 워싱턴 D.C. 인근 버지니아주 버크(Burke)의 롤링 밸리 몰에서 ‘Les Trois Continents’라는 피자 가게를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과거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91년 그의 신원이 알려지면서 결국 가게를 그만두게 됐다. 애덤스는 마지막으로 로안의 피자 가게를 방문했을 때 화장실 벽에 누군가 로안을 알아봤다는 취지의 모욕적인 낙서를 남겨놓은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응우옌응옥로안은 1998년 7월 14일 버지니아주 버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 로안의 즉결처형은 제네바협약 위반이었을까? 이 부분은 원문의 주장에 주의가 필요하다. 원문에서는 렘이 ‘불법 전투원’이었기 때문에 즉결처형이 허용될 수 있었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1949년 제3제네바협약 제4조가 민병대나 비정규군이 포로로서 전쟁포로(POW)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 협약은 비정규군이 책임 있는 지휘관의 통제를 받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식별표지를 갖추며, 무기를 공개적으로 휴대하고, 전쟁법과 관습에 따라 작전해야 한다는 등의 요건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해서 붙잡힌 사람을 현장에서 재판 없이 즉시 사살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렘은 불법 전투원이었으므로 제네바협약상 즉결처형이 허용됐다”는 원문의 설명을 확정적인 법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전쟁포로 자격 여부와 포로가 된 사람을 재판 없이 현장에서 살해할 수 있는지 여부는 별개의 국제인도법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문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에 대한 재판과 ‘그라이프 작전(Operation Greif)’을 언급한다. 당시 독일 특공대원들은 미군 군복을 입고 미군 진영에 침투했는데, 실제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적군 군복을 벗고 자신들의 군복과 표식을 드러냈는지가 중요한 법적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이 사례 역시 사이공에서 벌어진 렘의 즉결처형이 적법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한 장의 사진과 ‘절반의 진실’ ‘사이공 처형’은 베트남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 가운데 하나가 됐다. 사진 자체만 보면 상황은 명확해 보인다. 무장하지 않은 포로가 서 있고, 한 장교가 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 뒤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사진의 프레임 밖에는 그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존재했다. 렘이 누구였는지, 체포되기 전에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로안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여러 주장과 논쟁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배경이 현장에서 이루어진 즉결처형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에디 애덤스가 훗날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며 고민했던 문제였다. 카메라는 실제로 일어난 한순간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이 그 사건의 모든 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1968년 사이공의 거리에서 애덤스가 포착한 것은 불과 몇 분의 1초였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한 사람의 죽음을 기록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의 남은 인생을 규정했으며, 결국 전 세계가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진이 됐다.

사제와 죽어가는 병사: 1962년, 한 장의 상징적인 사진 1962년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 당시, 해군 군종사제 루이스 파디야(Luis Padilla)신부가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한 병사에게 마지막 성사를 베풀고 있다. 총성이 끊이지 않고 저격수의 총탄이 날아드는 거리에서, 파디야 신부는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마지막 성사를 베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섰다. 그러던 중 그는 총상을 입은 한 병사와 마주쳤다. 병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신부의 수단(cassock)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에도 총탄은 그들 주변의 콘크리트 바닥과 벽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이 장면을 촬영한 사진기자 엑토르 론돈 로베라(Héctor Rondón Lovera) 역시 총에 맞지 않기 위해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어떻게 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나는 45분 동안 쏟아지는 총탄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동안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는데, 그때 신부가 나타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땅바닥에 엎드린 채 어떻게 그 사진들을 찍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론돈은 정부군 병사가 해군 군종사제 루이스 파디야 신부의 옷자락을 붙잡고 기어오르듯 몸을 일으키는 순간을 포착했다. 파디야 신부는 반군 저격수의 총격이 날아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부군은 곧 도시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이후 이틀 동안 솔라노 성(Solano Castle)에 숨어 저항하던 반군을 집중 공격했고, 결국 이들을 제압했다. 체포되거나 사망하지 않은 소수의 반군만이 정글로 탈출할 수 있었다. ## 사진 속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 이 사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파디야 신부의 용기뿐만이 아니다. 신부는 자신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적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톨릭 문화가 강했던 당시 베네수엘라에서 성직자를 사살하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선전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고, 가톨릭 신자인 병사라면 그러한 명령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 뒤편의 간판이다. 배경에는 스페인어로 “Carnicería”라고 적힌 정육점이 보인다. 스페인어 *carnicería*는 문자 그대로는 ‘정육점’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대학살’, ‘참혹한 살육’, ‘아수라장’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스페인어에서 “Fue una carnicería.” 라는 표현은 흔히 쓰이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완전히 피바다였다.” 정도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사진 속 정육점의 Carnicería라는 글자는 우연히 배경에 들어온 간판이면서도,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전투와 묘하게 겹쳐진다. 죽어가는 병사와 그를 붙잡고 있는 신부, 주변을 때리는 총탄,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Carnicería’라는 단어. 이 우연한 대비는 사진이 보여주는 전쟁의 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 사진이 촬영된 순간 이 사진은 1962년 6월 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활동하던 사진기자 엑토르 론돈 로베라가 베네수엘라 신문 《La República》를 위해 촬영했다. 사진의 원래 제목은 《Aid From The Padre》, 즉 「신부의 도움」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보도사진상(World Press Photo of the Year)을 수상했고, 이어 1963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Pulitzer Prize for Photography)을 수상했다. ## 엘 포르테냐소(El Porteñazo) 이 사진이 촬영된 사건은 ‘엘 포르테냐소(El Porteñazo)’라고 불리는 군사 반란이었다. 엘 포르테냐소는 1962년 6월 2일부터 6월 6일까지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단기간의 군사 반란으로, 반군은 당시 로물로 베탕쿠르(Rómulo Betancourt) 정부에 맞서 푸에르토카베요(Puerto Cabello)와 그곳의 솔라노 성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헌정 체제가 출범한 지 불과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정부를 전복하려는 군사적 시도가 잇따르고 있었다. 푸에르토카베요의 해군기지를 중심으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 주민들도 반군을 지원하면서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반란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됐다. 전투 과정에서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약 700명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지며,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반군의 거점인 솔라노 성도 6월 6일 정부군에 함락됐다. 그리고 이 짧지만 참혹했던 전투의 한복판에서 한 사진기자가 셔터를 눌렀다. 죽어가는 병사는 신부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고, 신부는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1962년 베네수엘라의 참혹한 현실과 전쟁 속 인간의 용기를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청주 비닐봉지 살인사건 미제 17년 무엇이 풀리지 않았나 2009년 1월 18일 오전 6시 30분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의 한 대형할인마트에서 야간 청소 근무를 마친 이진숙(당시 57세, 가명) 씨가 퇴근을 위해 건물을 나섰다. 이 씨는 횡단보도 2개를 건너 월천1교를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했다. 회사에서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는 약 250m로 도보 5분 거리였다. 청원군에 위치한 집으로 가기 위해 첫 차를 기다리던 이 씨는 그대로 행방불명됐다. 실종 사흘 뒤인 1월 21일 이 씨의 남편이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접수했다. 수사가 진행되던 중 실종 14일째인 2월 1일 오후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동 현도교 밑 하천 변 풀숲에서 한 시민이 반려견과 산책하던 중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발견 장소는 실종 위치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이었다. 발견 당시 이 씨의 머리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실종 당시 입고 있던 외투와 가방 등 소지품은 현장에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로 확인됐다. 시신 신체에서는 저항이나 폭행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결박된 자국도 없었으며 음주나 약물 성분 역시 감정되지 않았다. 가슴 부위에서는 남성의 타액이 채취되어 DNA가 확보됐다. 버스가 오기 전 이 씨가 승합차에 탑승하는 모습이 버스정류장에서 200여m 떨어진 불법 주정차 단속 CCTV에 담겼다. 6시경 반대 방향으로 운행하던 차량이 유턴하여 이 씨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와 이 씨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이 씨가 차에 동승했다.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둡고 거리 감격이 멀어 차량 번호판은 식별되지 않았다. 경찰은 CCTV 영상에 찍힌 차량을 검은색 계통의 트라제XG 승합차로 추정했다. 청주 흥덕구 가경동부터 신탄진까지의 이동 경로상 CCTV를 수거해 동일 차종 20만 대를 조사 대상으로 올렸다. 트라제 소유주, 동종 전과자, 주변 인물 등 1,000여 명을 대상으로 DNA 대조 작업을 진행했으나 일치하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건 초기에는 이 씨가 제발로 차에 탄 점, 시신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얼굴을 가린 정황을 근거로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범인이 피해자와의 관계 때문에 사후 행위를 한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러나 차에 탑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짧고 저항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비면식범에 의한 강제성 없는 유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해자가 거부감 없이 차에 탑승할 만한 정황이나 운전자의 신뢰 유도 방식에 대한 분석이 엇갈렸다. 2017년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과 충북지방경찰청 장기미제수사팀이 발전된 영상 분석 기술로 CCTV를 재분석했다. 그 결과 범행 차량이 트라제XG 차종임이 확정되었고, 출시 연도와 옵션 사양을 바탕으로 수사 대상 차량의 범위를 좁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 데이터베이스와의 대조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나 현재까지 일치하는 인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범인의 DNA와 범행 이용 차종이라는 명확한 물증이 확보되었음에도 17년째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탑승 직전 나눈 짧은 대화의 내용과 범인이 어두운 새벽 도로에서 피해자를 정확히 차에 타게 만든 명분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2010년 남양주 밀실 살인사건, CCTV 188명 전수조사에도 미제로 남은 이유 2010년 11월 17일 오전 7시경,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한 신축 아파트 14층에서 74세 남편 박 씨가 지인들과의 골프 모임을 위해 외출했다. 15층 건물 중 14층에 위치한 해당 세대에는 박 씨와 69세 아내 이 씨가 거주하고 있었다. 약 한 시간 뒤인 오전 8시경, 피해자 이 씨는 서울에 거주하는 지인과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주식 투자 등을 주제로 나눈 통화는 노인회관에 가야 한다는 이 씨의 말과 함께 8시 18분경 종료됐다. 외출복을 차려입고 있었던 이 씨의 행적이 확인된 마지막 시각이다. 당시 경찰 수사 발표와 부검 결과에 따르면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은 통화가 끝난 오전 8시 18분 이후부터 정오 사이로 확인됐다. 골프 일정을 마치고 밤 11시 20분경 귀가한 남편 박 씨는 안방 불이 꺼진 채 집 안 전체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안방 불을 켠 박 씨는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린 채 숨져 있는 이 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피해자의 직접적인 사인은 경동맥 절단으로 밝혀졌다. 피해자의 얼굴과 목 등에서는 10여 차례 흉기에 찔린 흔적이 확인됐다. 피해자의 양손에서는 범행을 막아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방어흔이 11곳 발견됐다. 수사기관은 고령의 피해자가 한 번에 제압당하지 않고 상당 시간 저항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피해자의 집 주방에 구비되어 있던 부엌칼로 확인됐다. 사체 주변에서 발견된 해당 흉기에는 피해자의 혈흔이 다량 묻어 있었으나, 감식 결과 범인의 지문이나 외부인의 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범인의 동선으로 추정되는 족적도 발견됐다. 해당 족적은 외부 신발이 아닌 피해자 집 화장실 내부에 배치되어 있던 슬리퍼 자국으로 판명됐다. 수사팀은 범인이 화장실 슬리퍼를 착용한 뒤 주방에서 흉기를 가져와 안방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손 등을 씻은 뒤 슬리퍼를 제자리에 두고 이탈한 것으로 보았다. 현장 정황상 강도나 성범죄, 원한 관계의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침대 위에는 명품 시계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으며 사라진 금품은 확인되지 않았다. 장롱 내부가 어지럽혀진 흔적이 존재했으나 이는 범행 목적을 위장하기 위한 행위일 가능성이 수사선상에 올랐다. 피해자 및 가족 주변의 금전 대여 관계, 보험금, 가족 간 원한, 인근 정신질환자 소행 여부 역시 감정 및 조사 결과 관련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사건 당일 남편 박 씨의 동선과 알리바이는 휴대전화 위치 추적 및 지인 진술을 통해 검증되어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사건이 일어난 단지는 500여 세대 규모로 입주 1년이 되지 않은 신축 아파트였다. 건물 1층 공동현관과 14층 세대 현관에는 보안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출입 카드나 비밀번호를 사용해야 진입이 가능했다. 해당 설비는 출입 기록이 자동 저장되는 구조였으나 사건 당일 외부 출입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세대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면 방문자의 얼굴을 촬영하는 카메라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으나, 당일 영상 기록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경찰은 외부 침입 가능성을 다각도로 검증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전까지의 단지 내 CCTV 녹화 영상 전수를 분석했으나 특이 동선은 포착되지 않았다. 15층 옥상 난간과 외벽, 배관 수색에서도 밧줄 흔적이나 먼지 훼손 등 침입 및 도주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 지상 주차장이 없고 지하 주차장으로만 차가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으나 차단기 통과 기록 및 차량 출입 내역에서도 유의미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2층과 3층의 미입주 세대 출입 여부와 해당 동 내부 이동 가능성도 점검했으나 침입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옥상 이용 문제로 피해자와 마찰이 있었던 이웃 주민이 유의미한 용의선상에 올랐다. 경찰은 해당 주민의 자택 카펫을 압수 수색하고 집 안 혈흔 반응 감식 및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진행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현장 신발장 거울에서 지문 1건이 채취됐으나 분석 결과 1년 전 입주 당시 이삿짐센터 직원의 것으로 확인되어 사건과의 연관성이 배제됐다. 집 안 식기류 등에서 추출된 6명의 DNA 역시 범행과 무관한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수사 당국은 단지 내 CCTV에 포착된 188명의 행적을 조사하고 아파트 주민 전체의 당일 동선을 확인했다. 차량 운전자 조사, 지문 대조 440여 건, 통신 내역 확인 250여 건, 모발 및 혈흔 감식이 시행됐다. 혈흔 반응 검사는 피해자가 거주하던 동 전체 48세대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수사는 직접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채 난항을 겪었고, 사건은 2016년 장기 미제 사건으로 전환되어 경기북부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으로 이관됐다. 피해자는 자신이 거주하던 집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거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물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범인은 외부 출입 기록과 초인종 카메라 작동을 회피하는 방식을 취했거나 단지 내부 동선을 이용했을 정황이 존재한다. 피해자의 양손에 남은 11곳의 방어흔은 범행 과정에서 물리적 마찰이 상당 시간 지속되었음을 나타낸다. 현장 화장실에서 피를 씻어내고 슬리퍼를 제자리에 정돈한 뒤 이탈하기까지 현장에 타인의 DNA나 지문이 단 한 건도 남지 않은 점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2006년 12월 14일 새벽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서 노래방 도우미 배 모 씨가 실종됐다. 화성시 비봉면 일대에서 배 씨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졌다. 열흘 뒤인 12월 24일 새벽에는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서 노래방 도우미 박 모 씨가 실종됐으며, 박 씨의 휴대전화 전원 역시 화성시 비봉면 서해안고속도로 일대에서 끊겼다. 실종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2007년 1월 3일 화성시 신남동에서 퇴근 후 버스를 기다리던 회사원 박 모 씨가 실종됐다. 범인은 박 씨를 납치해 성폭행하고 신용카드 3장과 현금카드 2장을 빼앗은 뒤 목을 졸라 살해하고 화성시 비봉면 삼화리 농림지대에 암매장했다. 1월 6일에는 노래방 도우미 김 모 씨가 실종되어 목이 졸려 살해된 후 화성시 마도면 고모리 공터에 암매장됐다. 1월 7일에는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버스 정류장에서 대학생 연 모 씨가 실종됐다. 1년 10개월 동안 잠잠하던 범행은 2008년 11월 19일 다시 시작됐다. 수원시 권선구 당수동 버스 정류장에서 남편과 통화한 주부 김 모 씨가 실종됐다. 김 씨는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야산 일대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됐다. 2008년 12월 19일 오후 3시 7분쯤 대학생 안 모 씨가 군포시 산본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군포보건소 정류장에서 내린 뒤 실종됐다. 오후 3시 37분쯤 안 씨의 휴대전화 전원이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일대에서 꺼졌고, 오후 7시 28분쯤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의 현금 인출기에서 안 씨의 신용카드로 현금 70만 원이 인출됐다. 은행 CCTV에는 더벅머리 가발을 쓰고 손에 피임 기구를 낀 남성이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경찰은 비공개 수사를 진행하다가 2009년 1월 5일 공개 수사로 전환했다. 수사팀은 피해자 예상 이동 경로 CCTV에서 검은색 에쿠스 승용차가 반복해서 포착된 점을 확인했다. 차량 소유주 김 모 씨의 아들인 강호순이 실종 당일 차량을 운행한 정황을 잡고 2009년 1월 23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다. 압박을 느낀 강호순은 1월 24일 오전 5시 10분쯤 에쿠스와 무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집 안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포맷했다. 경찰은 같은 날 오후 5시 30분 강호순을 긴급체포했다. 강호순은 버스를 기다리던 안 씨를 차에 태워 현금과 신용카드를 빼앗고 성폭행을 시도하다 반항하자 폭행 후 목을 졸라 살해했다. 안 씨가 저항하며 손톱에 자신의 살점이나 머리카락을 남겼을 것을 우려해 가위로 안 씨의 손톱 10개를 모두 자른 뒤 안산시 본오동 도금단지 인근 논에 암매장했다. 경찰은 강호순의 포터 트럭에서 수거한 점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2008년 11월 실종된 주부 김 씨의 DNA를 검출했다. 증거가 제시되자 강호순은 실종된 여성 6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이어 2006년 9월 7일 강원도 정선군에서 정선군청 여직원 윤 모 씨를 무쏘 차 안에서 넥타이로 졸라 살해하고 영월군 삼옥재 절벽에 암매장한 사실도 추가로 자백했다. 윤 씨의 유해는 암매장 현장에서 백골 상태로 발견됐다. 범인은 왜 이토록 단기간에 많은 피해자를 상대로 흔적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을까. 강호순은 차량 보조석에 강아지와 찍은 사진을 두고 깔끔한 차림으로 접근해 초행길이라며 길을 묻는 방식으로 경계심을 허물었다. 차에 탑승하면 문을 잠그고 휴대전화 배터리를 즉시 분리했다. 수사 과정에서 강호순의 과거 행적도 재조명됐다. 2005년 10월 30일 새벽 안산시 반지하 주택 화재로 강호순의 4번째 아내와 장모가 숨진 사건이다. 당시 강호순은 아들과 함께 작은방에서 방범창을 뜯고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 조사 결과 남편이 머물던 방은 화재 피해가 거의 없었고, 창틀 고정 나사는 미리 풀어둔 듯 반만 걸쳐져 있었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강호순은 1999년부터 차량 도난과 화재, 운영하던 순댓집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보험금을 수령했다. 2005년 10월 화재 직전에는 부인 사망 시 수억 원이 지급되는 보험에 집중 가입했다. 아내 장례 직후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 지급 금액을 확인하는 녹취록도 확보됐다. 강호순의 자백과 수사를 통해 밝혀진 피해자는 방화 살인 피해자 2명을 포함해 총 10명이었다. 하지만 물증과 진술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남아 있다. 검찰이 강호순의 축사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곡괭이 날을 발굴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곡괭이 중간 부분에서 여성 2명의 DNA가 검출됐다. 강호순은 2008년 저지른 범행 2건에서만 곡괭이를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곡괭이에서 나온 DNA는 2008년 피해자들의 DNA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전에 자백한 피해자 5명의 DNA와도 모두 불일치했다. 곡괭이에서 나온 여성 2명의 유전자는 강호순이 자백한 10명의 피해자 중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최소 2명의 추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물증이다. 검찰이 곡괭이 DNA를 근거로 여죄를 추궁하자 강호순은 곡괭이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며 부인했다. 그러다 검찰 조사 14일째 되던 2009년 2월 17일, 갑자기 2006년 정선군청 여직원 윤 씨를 살해했다며 첫 번째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윤 씨의 유해에서 추출한 DNA 역시 곡괭이의 DNA와 일치하지 않았다. 최신 범행의 단서와 곡괭이 여죄 추궁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과거 범행으로 돌리려는 자백이었다. 강호순은 2009년 7월 최종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법적 처벌은 확정됐으나 곡괭이에 남아 있는 여성 2명의 신원과 여죄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는 곡괭이에서 추출한 유전자 프로필이 보존되어 있어 실종자 가족 DNA와 대조 작업이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현행법상 성인 실종자의 DNA를 채취해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관리할 법적 근거가 없어 대조 작업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살인마가 구속된 지 17년이 지났지만, 곡괭이에 남은 유전자 2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미제로 남아 있다.

고대 세계의 7가지 미스터리 인류가 기록을 남기기 이전부터 고대 문명은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지상에 남겼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물의 쓰임새나 흔적이 사라지면서 현대 학계의 해석이 갈리는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문헌 기록과 매장 유물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오는 고대 유적 7곳의 조사 기록과 관련 소문을 정리했다. 1. 오랜 세월 행방이 묘연한 성궤의 행방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십계명 석판을 보관했다고 전해지는 성궤는 고대 이스라엘 문헌과 지역 전승에 자주 등장하는 유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성궤는 솔로몬 왕이 건립한 첫 번째 성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전을 파괴하면서 성궤의 행방은 끊겼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성궤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는 주장과 함락 직전 비밀 장소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일부 고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특정 지역을 지목하며 탐사를 시도했으나 입증된 사실은 없다. 유물 자체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학설도 공존한다. 2. 공중에서만 형태가 보이는 페루의 나스카 라인 페루 남부 사막 지대에는 지상에 새겨진 거대한 지상화군이 펼쳐져 있다. 기원전 500년에서 서기 5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선들은 최대 400미터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한다. 사막 표면의 자갈을 치워 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림의 목적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식 공간이라는 견해부터 천문 관측용 지도, 용수 확보를 위한 기원 장소라는 해석까지 다양하다. 일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제작 목적은 여전히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다. 3. 라오스 고원에 늘어선 거대 석조 항아리군 라오스 씨앙쿠앙 고원에는 높이 1미터에서 3미터에 이르는 석조 항아리 2천 여 개가 산재해 있다. 기원전 1240년경부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항아리들은 90여 개 구역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한 구역에 항아리 하나만 놓인 곳이 있는가 하면 400개 이상이 모여 있는 장소도 있다. 학계에서는 매장용 용기로 추정하고 있으나 주변에서 함께 발견된 200여 개의 돌 원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덮개라는 주장과 매장 위치를 나타내는 표식이라는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4. 알렉산더 대왕의 사라진 묘역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한 알렉산더 대왕의 시신은 멤피스에 먼저 묻힌 뒤 알렉산드리아로 이장되었다고 고대 기록에 전해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의 무덤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해당 묘역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00회 이상의 공식 발굴 탐사대가 조직되어 추정 지역을 수색했으나 시신이나 묘역의 확실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5. 고대 그리스 선박에서 발견된 아날로그 계산 장치 기원전 70년에서 60년 사이 그리스 안티키테라섬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선박 유물 가운데 청동 톱니바퀴로 구성된 장치가 발견되었다. 안티키테라 메커니즘으로 불리는 이 유물은 약 37개의 톱니바퀴가 물려 작동하며 수십 년 앞의 천문 현상과 날짜를 예측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정도의 기술적 복잡성을 가진 톱니바퀴 장치는 14세기 유럽에서 태엽 시계가 등장하기 전까지 기록상 존재하지 않았다. 제작 기법과 전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고대 공학 기술의 주요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6. 사막 속으로 사라진 캄비세스 2세의 페르시아 군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는 5만 명 규모의 군대를 이집트 서부 사막으로 보냈다. 시와 오아시스의 암몬 신전을 정벌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들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헤로도토스는 모래폭풍이 불어와 군대 전체가 사막에 매몰되었다고 적었다. 2009년 이탈리아의 영화제작자 형제가 해당 군대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집트 고유물고등위원회는 공식 굴착 허가를 받지 않은 주장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혀 공식적인 발견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7. 몰타 지하에 조성된 대규모 매장지 1902년 몰타에서 공사 도중 지하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2500년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구조물은 석회암을 파내어 3개 층으로 만들어졌다. 내부에서는 약 7천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내부 구조 중 신탁의 방으로 불리는 공간은 소리의 울림이 구조물 전체로 전달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공간이 특수한 음향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엄여인 보험 살인 사건, 보험금을 노린 5년간의 연쇄 범죄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엄여인 보험 살인 사건은 가족과 주변인을 대상으로 보험금을 노리고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사건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 엄인숙은 남편과 가족 등을 대상으로 상해와 살인을 반복했고, 보험금을 편취한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방송과 언론을 통해 공개된 피해자 유족과 생존 피해자의 증언은 당시 수사 기록과 판결문에 담기지 않은 사건 전후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보험 가입 이후 반복된 상해 서울중앙지방법원 2005고합522 판결문에 따르면 엄인숙은 보험설계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을 보험에 가입시킨 뒤 범행을 계획적으로 실행했다. 첫 번째 남편은 여러 차례 우울증 치료 약물을 먹은 뒤 눈을 찔려 실명했고, 끓는 기름에 의한 화상과 흉기에 의한 상해를 입었다. 이후 다발성 장천공으로 사망했으며 보험금 약 2억 8천만 원이 지급됐다. 두 번째 남편 역시 비슷한 방식의 피해를 입었다. 판결문에는 반복적인 상해 끝에 사망했고 보험금 약 3,882만 원이 지급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MBC와 STUDIO X+U 공동 제작 프로그램 '그녀가 죽였다'에서 공개된 두 번째 남편 유족 인터뷰에서는 피해자가 화장실에서 골절을 입은 뒤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후 오른쪽 눈을 실명한 과정이 소개됐다. 유족은 피해자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상태가 계속 악화됐으며 결국 2003년 2월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해당 내용은 방송 인터뷰를 통한 유족의 증언이며, 판결문에서는 두 번째 남편에 대한 반복적인 상해와 보험금 편취가 인정됐다. 가족까지 범행 대상으로 삼다 판결문에 따르면 엄인숙은 친모에게 우울증 약물을 먹인 뒤 주사기 바늘로 눈을 찔러 실명하게 했다. 친오빠에게는 술에 약물을 탄 뒤 양쪽 눈에 염산을 넣어 실명시켰고, 이후 보험금을 수령했다. 2005년에는 가족이 거주하는 집에 불을 질러 오빠와 남동생에게 화상과 흡입 손상을 입혔다. 방송 '그녀가 죽였다'에서 친오빠는 "술을 마신 뒤 기억이 사라졌다"고 증언했고, 입원 중 링거를 통해 추가 살해 시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방송 인터뷰를 통해 공개된 증언이며, 판결문에도 입원 중 피해자의 링거에 약물을 주입해 생리 기능을 훼손한 범행이 인정됐다. 보험금을 노린 범행은 가족에만 그치지 않았다. 판결문에는 자신을 돌봐주던 지인의 집에 방화를 저질러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과 병원에서 알게 된 피해자를 상대로 약물을 이용한 강도 및 신용카드 사용 범행도 포함됐다. 수사는 무엇을 밝혀냈나 수사기관과 법원은 각각의 사건을 개별 사고가 아니라 동일한 범행 패턴으로 판단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범행 이전 보험에 가입돼 있었고, 약물을 먹은 뒤 기억을 잃거나 의식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후 눈을 찌르거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실명을 유발했고, 화상이나 흉기에 의한 상해도 반복됐다.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후유장해가 발생하면 보험금이 청구됐다. 범인은 왜 같은 수법을 반복하면서도 오랜 기간 의심을 피할 수 있었을까. 판결문은 이러한 반복성과 계획성을 양형 사유로 판단했다. 법원은 보험금 편취 목적이 명확했고 동일한 방식이 여러 차례 반복됐으며,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중대한 후유장해를 입은 점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일부 신용카드 관련 공소사실은 무죄가 선고됐지만 주요 범행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방송을 통해 다시 드러난 피해자들의 증언 2026년 MBC와 STUDIO X+U가 공개한 '그녀가 죽였다'에서는 두 번째 남편 유족과 친오빠가 처음으로 당시 상황을 직접 증언했다. 프로파일러 권일용은 방송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형태의 연쇄살인이었다"고 회상했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역시 피고인이 범행에 대한 죄책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내용은 방송 인터뷰에서 공개된 발언이다. 같은 방송에서는 사건 발생 약 20여 년 만에 엄인숙의 얼굴도 처음 공개됐다. 사건 당시에는 신상이 공개되지 않아 '엄여인'이라는 별칭으로만 알려졌지만, 방송은 당시 촬영된 사진과 피해자 증언을 함께 공개했다. 판결문은 엄인숙이 보험금을 편취하기 위해 장기간 동일한 범행을 반복했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남겼다고 판단했다. 다만 두 번째 남편 사망 당시 부검 결과가 한때 사인 불명으로 알려졌던 점,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범행 전체가 입증됐는지는 여러 사건을 종합한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 사건에서 가장 설명력이 높은 증거는 개별 범행 하나가 아니었다. 반복되는 보험 가입, 약물 사용, 실명과 화상, 보험금 청구라는 동일한 흐름이 여러 피해자에게 이어졌다는 점이 수사와 재판에서 하나의 연쇄 범행으로 연결된 핵심 근거가 됐다.